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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2009.09.11 16:49

어톤먼트
감독 조 라이트 (2007 / 영국)
출연 키이라 나이틀리, 제임스 맥어보이, 시얼샤 로넌, 로몰라 가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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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없는 것을 장악함이 이야기의 매력이라면, 착각 혹은 착시는 영화의 운명이다. 영화 [어톤먼트]와 그 원작의 명민함은 자신의 기원을 정확히 인지한 것에서 비롯된 셈이다."

 

이 문구는 씨네 21 오정연 기자의 [어톤먼트] 영화평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이는 영화 [어톤먼트]의 핵심을 꿰뚫는 문장이다. [어톤먼트]는 원작을 비교적 잘 따라가면서도 소설과는 엄연히 다른, 영화만의 장점을 십분 살린 작품이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데뷔작 [오만과 편견]에서 원작 소설을 놀라우리만치 완벽하게 재현해낸 조 라이트가 이언 매큐언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 솔직히 우려감이 앞섰다. 이언 매큐언이 소설 속에서 비평자의 입을 빌어 언급하듯, 원작 소설은 (영화의 구성과도 일치하는) 1부의 숨막히는 사건에 비해 2,3부의 서사적 긴장감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소설의 분량이 워낙 방대할뿐더러 특히 브리오니의 부분은 마치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처럼 의식의 흐름을 쫓아 서술되기 때문에, 영화화하기 상당히 까다로운 면이 있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은 제인 오스틴의 소설처럼 서사가 주를 이루는 리얼리즘 소설을 묘하게 벗어나 있다. 모더니즘 소설 적인 면모를 상당 부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소설을 영화화할 때 '원작에 충실하다'라는 의미는 원작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표현해낸다, 의 뜻보다는 서사적으로 별 다른 윤색 없이 줄거리를 그대로 가지고 간다, 라는 뜻이 된다.

 

무슨 이유에선지 조 라이트는 [오만과 편견]에 비해 상대적으로 까다로운 [어톤먼트]를 영화화하기로 결심했고, 다행히 이 문제를 아주 잘 풀어냈다. 그는 원작 소설의 문학적 성과를 과감히 포기하는 대신 영화만이 지닐 수 있는 매력에 집중했다. 하기야 '원작에 충실'이라는 성과는 이미 [오만과 편견]으로 이루어냈으니, 굳이 그 작업을 또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단정적으로 말한다면 [어톤먼트]는 원작에 충실하지 않다. 그 의미가 줄거리를 그대로 옮기는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혹시나 이 영화가 원작을 잘 재현해냈다, 라는 평을 들었다면 그것은 명백히 소설의 줄거리를 비교적 잘 따랐기 때문이지, 소설의 성과를 영화로 잘 옮겨냈기 때문은 아니다.

 

잠깐 원작 소설의 놀랍도록 훌륭한 성과를 언급하고 넘어가자. 그래야 이 영화가 소설과 다른 성과를 낸 점이 분명하게 드러날 테니 말이다.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하나는 브리오니가 세실리아를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는 부분의 충격적 묘사이고, 다른 하나는 소설에 비평자를 등장시켜 이 소설을 자체적으로 피드백 하는 식의 구성이 주는 문학적 자의식이다.

 

우선 첫째로 브리오니가 세실리아를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는 장면. 여타의 소설들이 독자에게 기쁨, 슬픔, 깨달음, 독해의 즐거움 등을 선사한다면 이 소설은 굴욕감이라는 새로운(?) 감상을 느끼게끔 해준다. 브리오니 자신이 생각한 속죄의 방법이 그대로 무너지고 아무 말도 못한 채, 그저 ''라는 대답만을 거듭하는 소설의 묘사 속에선 어릴 적 부모님이나 선생님 앞에서 호되게 꾸중을 들을 때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난처함 내지는 굴욕감이 생생히 느껴진다. 마치 혼내는 사람은 점점 덩치가 커져가고 자신은 점점 쪼그라드는, 그래서 그저 그 상황을 얼른 벗어나고 싶기만 한 기분.

 

이는 영화에선 그다지 잘 표현되지 않았다. 진정 영화적인 기법으로는 이러한 모욕의 내밀한 감정을 제대로 표현해낼 수 없는가, 에 대해선 뭐라 말을 못하겠다. 불가항력적인 것인지 연출력 부족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유야 어찌됐든 영화 [어톤먼트]에서 이 장면은 격한 표현을 빌자면 매우 실망스럽다. 영화 전체의 중심이 브리오니 보다는 세실리아와 로비에게 쏠려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이 장면에서는 그 점이 아쉽게만 느껴진다. 로비의 다그침에 속수무책으로 대답만 하는 장면에서의 컷 분배가 가장 실망스러운데, 자연스럽게 대사가 많은 쪽(로비)에 많은 컷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브리오니의 감정이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될 여유가 줄어든 것이다. 성마른 생각이긴 하지만 차라리 로비의 꾸중을 듣는 브리오니의 얼굴을 잡는 역앵글숏이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도 소설만큼의 충격을 표현하긴 어려웠을 테지만.

 

(이미지 출처: 문학동네)

둘째로 소설이 훌륭한 점은 문학적 자의식에 대한 부분이다. 소설에 비평자를 등장시킨 것은 이언 매큐언의 천재적 성과이다. 이언 매큐언은 브리오니의 것이긴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것인 이 소설을 자체적으로 비평하는 효과를 창출했고, 이를 통해 소설가가 소설을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글쓰기의 근본적인 물음에까지 주제의식을 근접시킨다. 글쓰기로 '속죄'가 가능한가. 브리오니에게, 또한 이언 매큐언 자신에게 글쓰기는 무슨 의미가 되는가. 또한 소설, 혹은 예술에 있어 비평이란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영향력의 파급은 어디까지인가. 이런 글쓰기 자체에 대한 성찰이 소설 전반에 깔려있다는 점이 소설 [어톤먼트]의 매력이라 하겠다.

 

당연히 이런 장점은 영화에서 표현될 수 없다. 이는 텍스트만의 장점임이 확실하다. 그리고 조 라이트의 [어톤먼트]가 영리한 영화인 것은 서두에 인용한 글에서 말하듯, 애초에 소설과는 다른 기원을 가졌다는 걸 정확히 인지한 까닭이다.

 

흥미롭게도 영화에서 브리오니의 벌받음이 가장 극명히 드러난 장면은 세실리아를 찾아가는 장면도, 병원에서 개고생을 하는 장면도 아닌, 마셜과 롤라의 성당 결혼식 장면이다. 영화의 백미라고 일컬어도 섭섭하지 않을 이 씬에서 조 라이트는 플래시백을 주도적으로 사용하는데, 이는 소설이 표현하기 어려운 영화만의 장점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기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물론 플래시백이 꼭 영화만의 기법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조 라이트가 이 장면에서 사용한 플래시백은 분명 영화에서만 가능한 현란한 기법이다. 어째서 그런가.

 

성당에 들어선 브리오니가 의자에 앉아 사촌 롤라와 어릴 적 그녀를 강간한 진범, 마셜의 결혼식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카메라가 서서히 브리오니에게 다가가면 플래시백이 시작된다. '제가 그를 보았어요'라고 말하는 어린 브리오니, 다시 현재 그들을 바라보는 브리오니, 작은 랜턴을 들고 무언가 발견한 듯한 표정의 어린 브리오니를 거쳐 마침내 롤라를 덮치는 마셜의 얼굴이 확 비춰지는 장면까지 이르면 극적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이는 밀도 있는 편집으로 서스펜스를 창출해냈다는 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것이 이 장면이 지닌 가치의 전부는 아니다. 극 초반 경찰에게 증언을 할 때 '제가 그를 보았어요'는 분명 로비를 가리킨다. 하지만 성당 결혼식에서 플래시백으로 삽입되었을 때엔 로비가 아닌 마셜을 지칭하게 된다. 똑 같은 장면인데 의미가 바뀐 것이다. 디제시스 안에서 브리오니의 착각으로 인해 일어난 이러한 효과는 같은 장면을 되풀이하면서도 다른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을 통해 관객에게 오롯이 전이되고 있다. 이는 서두에 인용한 '착각 혹은 착시는 영화의 운명이다'라는 오정연 기자의 언급과 궤를 같이 한다.

 

같은 장면으로 다른 의미를 창출해내는 플래시백은 분명 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무기이다. 더 나아가 극 초반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진범 마셜의 얼굴이 확 비치는, 플래시백처럼 보이긴 하나 실은 전혀 새로운 장면을 절묘하게 덧붙일 수 있는 것도 영화 예술의 매력이다. 이 현란하고도 주도적인 플래시백 기법을 통해 조 라이트가 의도한 바, 혹은 성취해낸 바는 두 가지다. 첫째는 세실리아를 만나는 장면에서 이루지 못한 브리오니의 굴욕감을 이 장면을 통해 드러낸 점이다. 진실을 극적으로 드러낸 기법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것을 함구하고 그들 앞에서 시선을 떨구는 브리오니의 모욕이 더욱 강렬히 전해진다. 둘째는 이언 매큐언이 소설에서 활자를 통해 글쓰기의 본질 탐구에 열중하듯, 조 라이트는 이런 착시 유희를 통해 과연 영화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점이다. 그는 관객과 게임을 하고 있다. (소설과 다르게) 로비와 세실리아를 찾아간 장면은 허구이며 해피엔딩을 바라는 자신의 열망이 투영된 것이다, 라고 말하는 짤막한 에필로그가 의미 있는 이유도 바로 그거다. 만약 결혼식 장면의 착시 놀음이 없었더라면 이 의미 있는 '사기 행각'은 말 그대로 지나친 장난거리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자칫하면 소설로나마 그들을 행복하게 해준 게 속죄의 전부냐, 하며 오해할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이미지 출처: 네오이마주)

 

소설 속 브리오니의 속죄는 그녀의 평생에 걸친 삶에 담겨있다. '글쓰기란 무엇인가'를 평생 고찰하며 결과물을 만들어내려는 그녀의 자의식 속에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깃들어있기에 독자는 그녀의 삶을 모두 훑어보면서 속죄의 의미를 곱씹을 수 있게 된다. 이런 이유로 영화보다 비교적 길게 서술되어 있는 노후의 에필로그가 의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짧다. 기껏해야 두 시간 남짓이다. 그래서 영화 속 브리오니의 속죄는 그녀의 삶 전반에 걸쳐있다기 보다는 되려 어느 한 순간-성당 결혼식 장면과 같은-에 함축적으로 들어있을 수도 있다. 그것이 영화가 소설과 다른 점이다. 소설이 지속성의 예술이라면 영화는 순간성의 예술이다.



(이 글은 영화 전문 비평사이트 [네오이마주]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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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르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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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영화보다 원작 소설이 훨씬 묘사가 깊숙하다는 사실은 저도 공감합니다. 그것 때문에 이언 매큐언의 '속죄'를 결정적으로 몰입하며 볼 수 있었고요. 그만한 굵기의 책을 사흘만에 독파한 건 아마 '속죄'가 거의 유일한 것 같군요.
    확실히 원작 소설을 먼저 읽은 사람에게는 불만이 엿보이는 것이 [어톤먼트]의 결과 같습니다. 그 방대한 얘기를 120분 남짓의 영화에 구겨넣는다는 것 자체가 좀 무리이긴 했지요. 저는 이 정도의 결과로도 만족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요. 특히 후반부 노년의 브리오니가 갖는 속죄의 시간을 인터뷰 하나로 처리해 버린 건 정말 ㅠㅠ 가장 두고두고 아까운 점이 될 듯.

    2009.09.12 08:42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저도 이언매큐언의 원작을 읽고는 홀딱 반해버렸어요. 그래서 처음엔 영화를 보고서 실망했던 부분부터 생각이 나더라고요. 차라리 서평으로 써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었죠. 그런데 곰곰이 영화를 묵상해보니 꽤 괜찮은 영화만의 장점이 보이더군요. 책만큼은 아니겠지만 말이에요^^

      2009.09.12 18:25 신고 [ ADDR : EDIT/ DEL ]
  2. 신성화

    책을 안봐서 잘 모르겠지만 제가 볼때는 영화에서도 '굴욕감'이란게 느껴지던 걸요. 잘 기억은 안나지만 잘못을 빌러간 브리오니에 대해 마구 쏘아 붙이는 언니. 몸만 성장했지 아직 철이 없어 보이는 브리오니는 그래도 가족지간인데 자신이 스스로 잘못을 비는 것에 대해 그렇게 까지 나올거라고 생각지도 못했겠지요. 고개 숙이는 브리오니, 변명하듯 덧붙이는 말들. 그 속에서 충분히 굴욕감을 느끼고도 남았을거에요.

    2009.10.25 23:13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3.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회가 되시면 소설도 읽어보셔요^^ 정말 기가 막힌 소설입니다.

    2009.10.26 10:49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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